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키가하라 전투 (문단 편집) === 이해 관계 === 정통성에서 둘 다 히데요리의 가신이라면 굳이 벌어질 필요 없는 전투가 벌어진 건 당연히 양측의 이해 관계 때문이었다.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전쟁을 치르게 되면서 전후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겪은 영주들은 이를 만회할 필요가 있었다. 때마침 히데요시가 죽었고 그 뒤를 이을 후계자가 어리니 충분히 이 혼란을 이용해먹을 속셈이 가득했다. 여담이지만 이에야스는 [[어부지리|임진왜란 최대의 수혜자 중 한 명으로]] 그는 히데요시가 조선침공 직전 [[후호조씨|호조 가문]]을 토벌한 이후 이에야스의 영지인 [[미카와]](現 [[아이치현]] 동부)라는 기반을 없애고 먼 곳으로 옮겨 가문에 위협이 될 화근을 없앨 겸 홍수 등 피해가 자주 발생하는데다 백년이 넘게 호조 가문의 영지였던 [[간토 평야|간토 대평야]]로 이봉시켰다. 사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가 [[잇키]]에 고생하면서 힘을 잃기 바라던 조치에 이에야스가 반역을 일으킬 경우 시간을 벌려는 의도였으나, 정작 이에야스는 새로 옮긴 간토에서 세력이 약해지긴 커녕 치수 정비 등으로 홍수를 줄이는 것은 물론 자신의 거성인 [[에도 성]]을 엄청나게 리모델링을 잘 해서 일본에서 가장 화려한 성으로 만들어 놓았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성을 얼마나 잘 만들어 놓았는지 [[메이지 유신]] 이후부터 계속 [[천황]]의 [[황거]]로 사용하고 있다.] [[간토평야]]지대에서 나오는 대량의 식량이 나오는 곡창지대를 확보하는 등 뛰어난 내정 능력을 보여주며 고쿠타카가 일본에서 1위인 대다이묘가 되었다. 당연히 히데요시는 도쿠가와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임진왜란에 참전하라는 명령을 하달했으나 영리한 이에야스는 자신이 자리를 비울 시 잇키가 크게 발발할 가능성이란 훌륭한 명분으로 이 명령을 계속 거절할 수 있었고, 덕분에 임진왜란으로 인해 아무것도 잃지 않은 몇 안 되는 [[다이묘]] 중 하나[* 사실 이에야스를 비롯해 마에다, 우에스기 등 동부 지방의 대다이묘들은 보급문제로 인해 대타로 잠깐 파병하거나 아예 파병하지 않았기 때문에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나마 적극적으로 참전한 다테 마사무네 역시 소규모의 과시용 부대만 데리고 참전했을 뿐이다. 이 외에 소다이묘 중 피해를 입지 않은 가문은 사나다 가문이었는데 사나다 가문 역시 교토를 중심으로 보면 동부 다이묘였으며, 일단 군령에 의해 집결지에는 모였으나 현 나가노현 산골짜기에 있다보니 군대 규모도 적고 멀었기에 후순위로 밀려서 조선 침공에 참가하지 못한 케이스였다. 그 밖에도 야마우치 가문 등이 참전하지 않았다.]였다. 이 속셈을 잘 아는 미츠나리 입장에서 이에야스는 더할 나위 없이 큰 적이었다. 도요토미 가문의 가장 큰 적들 중 하나였고 당장은 충성하지만 언제든 천하를 노릴 야심가이며 히데요시가 죽은 지금 적자인 히데요리는 어리니 실질적으로 가장 막강한 세력을 쥔 것도 그였다. 당연히 미츠나리는 이에야스를 경계했으나 이게 너무 노골적인 게 문제였다. 어쨌든 히데츠구 사건을 통해 입은 은혜도 있거니와 이에야스의 적극적인 포섭에 넘어간 다이묘들 입장에서는 이에야스보다 훨씬 위험한 자가 미츠나리였으며 더욱이 미츠나리는 천천히 기회를 노리며 적의를 숨겨 드러내지 않았는데 정작 미츠나리가 적의를 드러내며 어떻게든 죽이려고 수작을 부리니까 미츠나리가 권력을 탐한다고 여긴 것도 있다. 더욱이 히데요시가 길러둔 군부 최측근으로 만들던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은 미츠나리 세력에게는 중앙집권을 노리는 도요토미 정권에 있어 불필요한 존재로 여겨져왔던 만큼 미츠나리가 이들이 꼼수를 부리는 것을 얄짤없이 막는 노골적인 행보에 엄청난 반감을 사고 말았다. 결국 이들은 히데요시 사후 이에야스 편에 붙어 그동안 자기들과 대립해온 미츠나리 파를 제거하면, 히데요리를 든든히 지키며 동시에 본인의 입지도 다질 수 있다고 판단한다. 또한 대부분의 당대인들, 다이묘들은 제아무리 이에야스가 너구리처럼 자신의 속셈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들, 이미 이에야스의 천하가 다가왔음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다.[* 물론 토요토미 가신들끼리의 전쟁이라는 성격이 있었긴 했지만 히데요시 사후의 이에야스는 이미 일본 제일의 세력가였다. 토요토미 본가의 영지 220만 석에 비해도 이에야스 자신이 이미 칸토 평야의 250만 석을 차지하고 있었고, 원래의 본거지인 미카와 지역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토요토미 정권이 유지되더라도 이에야스의 영향력이 점차 강화되리라는 점은 예상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이에야스는 적이 많았던 미츠나리와 달리 전반적으로 원로로써 원만한 평판을 받고 있었다. 애시당초 토요토미 가문의 권세부터가 원래 히데요시가 섬기던 오다 가문의 권력과 영토, 군사력이 [[혼노지의 변|반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주]]와 [[오다 노부타다|후계자]]가 하룻밤 사이에 몰살당하는 사태가 벌어져 최고권력자 자리가 공백이 된 상황에서 주군의 복수를 명분삼아 [[아케치 미츠히데|반란 주동자]]는 물론이요 [[시바타 카츠이에|경쟁자들]]과 [[오다 노부타카|주군의 아들]]까지 가문 내 세력경쟁에서 차례차례 제거하며 가로챈 것이었으며, 그 오다 가문도 본래는 [[오와리]]의 슈고다이에 불과한 위치였는데도 하극상을 일으켜 본가와 주군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았던 전례가 있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은 어린 히데요리보다는 히데타다라는 장성한 후계자가 있고 본인도 능력과 인망 면에서 누구보다 나은 이에야스가 패권을 차지할 거라고 예상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이에야스에게 붙어 어떻게든 도요토미 가문을 지킬 것인가, 가장 큰 위험인 이에야스를 어떻게든 축출할 것인가에 대해 의견이 갈린 것이다. 이후의 역사를 본다면 미츠나리의 관점이 맞았지만 불행히도 그는 이에야스를 따르는 측근들을 설득할 인망도, 능력도 부족했고 애초에 본인부터 자신과 척 지고 있던 다른 토요토미의 다른 가신들을 굳이 설득할 생각이 없었다. 즉 도요토미 가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잠재적인 적]]을 두고 있었지만, 미츠나리로 인해 단결하지 못하고 결국 반 미츠나리 세력은 오히려 도쿠가와에게 붙어버린, 도요토미 가에게 있어선 최악의 형세로 흘러간 것이다.[* 다만, 그 이전의 일본 역사를 살펴보아도 새로운 쇼군가의 후계자가 어린 경우 권신이 쇼군가를 몇대에 걸쳐 좌지우지하는 등의 사례가 이미 있었기에, 당시 관점에선 반드시 이에야스의 집권이 도요토미 가문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